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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상

반기문 전 UN총장에 대한 잡상

오삼도리 2017. 1. 18. 09:16



제7대 외교통상부 장관이자 제8대 유엔 사무총장을 맡았던 반기문은 유일한 한국 출신 유엔 사무총장이자 아시아-태평양 지역 그룹 출신의 두 번째 사무총장이었습니다.


1944년 6월 13일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당리 행치마을에서 태어나 세살 때 충주시로 이사 후 초, 중, 고등학교를 다녔고, 현재도 반기문의 가족들은 충주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당시 가난한 집안이였지만 집안일을 도우면서 항상 1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으스대지 않고 진중한 성격이라 동네 어른들은 그를 내성적인 학생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반기문이 졸업한 충주고등학교는 그가 사무총장 당선 이후 기숙사를 새로 지으면서 반기문 총장의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62년 여름에 적십자가 후원하는 에세이 대회에서 대한민국 대표 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자신의 우상인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고, 당시 그 만남에 참여했던 한 저널리스트가 장래 희망을 물어보자 그는 "외교관이 되겠다"고 말했고, 결국 그 꿈의 정점에 올랐습니다.


1963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現 정치외교학부)에 입학했고, 1970년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전두환 정권 시기 국무총리이자 국가안전기획부장이었던 노신영 밑에서 외무와 정무(총리실 의전비서관)를 배웠으며, 그를 롤모델로서 존경한다고 합니다.

참여정부에서 (후술하겠지만) 정권의 성향과는 다소 상이한 인사로 제7대 외교통상부 장관을 역임했는데, 재직 중이던 2004년 이라크에서 김선일이 납치, 피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반 장관은 알자지라 방송에 직접 출연해 석방을 호소하는 등 제스처를 취했으나 구출작전이나 교섭 등 실질적인 조치 없이 방송 호소만으로 씨가 먹힐 자들이 아니었고, 결국 김선일은 참수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외교부 장관 경질론까지 불거졌었고, 반 총장 자신도 이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북한은 반기문 당시 장관을 두고 '친미사대 매국노'라며 비난한 적이 있습니다
한미 FTA 찬성, 이라크 파병 찬성 등 당시 외교현안에서 한미 동맹을 중시했습니다. 반기문과 송민순, 윤광웅 등의 한국 핵심 관료들이 주한 미군 기지의 오염 정화비용에 대해 미국이 부담해야 한다는 환경부측의 주장을 묵살하고 한국이 비용을 부담하라는 미국측 입장에 우호적으로 반응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위키리크스를 통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알렉산더 버시바우 전 주한 미대사는 본국에 보낸 기밀문건을 통하여 반기문을 가리켜 '미국의 모든 사안에 대해 본디 호의적이다(he is naturally sympathetic to all things American)'고 평가했습니다.

이에 대해선 개인의 신념은 개인의 자유고, 그 결과로 외교관 직무상 어떤 심각한 손해를 끼친 적은 없으니 그걸 가지고 가타부타 하는건 도가 지나치다는 견해와 반대로 요직의 공무원이나 정치인이 가진 개인적 시각이 공무나 정치적 사안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를 생각하면 중요한 문제고, 실제로 미군기지 사건에서 그로 인해 한국에 손해를 끼쳤으니 비판할만 하다는 견해가 있기도 합니다.


이후 2006년 10월에 UN 사무총장 선거 출마를 선언했습니다. 전임의 아프리카 가나 출신 코피 아난에 이어 마침 아시아 대륙에서 사무총장을 낼 차례가 돌아왔는데, 출마선언한 아시아 각국의 경쟁자들이 어째 죄다 결격사유가 있어서 유력후보로 급부상했습니다.

경쟁자 면면을 살펴보자면, 유력한 후보 중 한 명이었던 인도의 샤시 타루는 다 좋은데 모국이 급부상하는 신흥 강대국 이라 집중 견제 당했고, 아프가니스탄의 아스라프 가니는 반대로 모국의 상태가 최악 일변도 인지라 제대로 활동이 가능한지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제대로 된 득표활동을 치루기 힘들었습니다. 타루와 함께 유력 후보였던 태국의 수라끼얏 사티라타이는 당시 모국의 정국불안으로 무너졌고, 스리랑카 후보는 내전 중 타밀족 인권문제가 걸려 지지를 얻기 힘들었습니다. 요르단 후보는 서방세계의 아랍사회에 대한 불안감이 문제가 되면서 탈락했고, 라트비아 후보는 UN 사무총장의 대륙별 순회원칙을 무시한 유럽 후보인 바람에 거의 지지를 얻지 못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어서 사실상 상임이사국 취급을 받고 있는데다, 전쟁범죄와 과거사가 발목을 잡았는데 여기에 이를 가는 나라 중 하나가 상임이사국인 중국인지라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그럼에도 사무총장이 되는 과정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상임이사국 중 하나인 프랑스는, 반기문은 프랑스어 못한다라는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하려 했습니다. 단순히 프랑스의 자존심 문제라고 치부할 수 없는게, 프랑스어는 16세기 이래 세계 외교가의 표준언어인데다, UN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할 아프리카 대륙에선 제1 공용어입니다. 결격사유로써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반기문은 프랑스어 과외 교사를 고용해서 프랑스어를 벼락치기로 공부,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던 자크 시라크와 어느정도 대화를 하는 데 성공하여 프랑스의 지지를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당시 행정부이던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도 반기문 총장 당선을 위해 부단히 움직인 바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당시 준비 중이던 07~08년 비상임이사국 선거에서 경합을 포기하고 경쟁자 중 하나인 인도네시아를 지지했습니다. 이에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가 즉시 반기문을 지지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동남아시아의 지지도 지지지만, 사무총장 배출국이 비상임이사국까지 해먹는다는 비난을 막기 위함이 컸습니다. 코피 아난 전 사무총장 시절 가나 공화국도 비상임이사국을 한 적이 있지만, 그건 적어도 2차 임기 중일 때였습니다.

그 외에도, 노무현 대통령은 반기문의 유엔 사무총장 당선을 위해 아프리카와 유럽 지역 순방에 당시 외교장관이었던 반기문을 동행시켰고, 특히 위에서도 언급한 프랑스 표를 공략하기 위해 일부러 아셈(ASEM) 회의에 참석해서 프랑스 대통령과 독대할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으며, 굳이 급하게 정상회담을 할 필요가 없는 아프리카 국가들을 돌면서 반기문이 유세할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에서 유엔 사무총장이 나온다는 건 멋진 일이 아닌가?'라고 말했고, 정부 내에 전담기구를 두어 반 장관을 지원했습니다.여담으로 당시 기자들은 참여정부의 총장 선거 지원 프로젝트를 'Secretary General(사무총장) Wannabe'이니 SG워너비라고 했다는 풍문도 있습니다. 당시 외교부 2차관이었던 이규형 차관을 중심으로 태스크포스를 구성하고, 나중에 유엔 사무차장보를 역임하게 되는 김원수 장관특별보좌관은 투표권을 지닌 이사국들의 표심을 분석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참고로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 대표인 전여옥은 '반 장관의 출마와 한국이 UN 사무총장을 배출하는 것은 국제사회의 조롱거리'라고 말했던 바 있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 한나라당의 후신인 새누리당이 반기문을 대선후보로 영입하려는 모습을 보면 아이러니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런 노력에도 이후 계속되는 유엔 안보리 총장후보 찬반투표에서 반기문에 대한 반대표가 계속해서 1표가 나왔습니다. 사무총장은 만장일치 추대를 기본으로 하는데다, 무기명 투표에서 나온 반대표 1표가 상임이사국의 표일 경우, 독보적 1위라 하더라도 사무총장 취임이 불가하기에 당시 한국은 상당히 긴장했습니다.다른 후보들이 계속 저조한 지지로 사퇴하는 와중에도 반기문에 대한 반대표 단 1표가 계속 등장하여 모두들 불안감에 휩싸였으나, 마지막 안보리 투표에서 찬성 14, 기권 1로 반대표가 기권으로 바뀜으로서 반기문이 최종적으로 차기 UN 사무총장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대체 어떤 나라에서 반대표를 던진 것인가에 대해 이런저런 추측이 나왔었는데, 2008년에 출판된 존 볼턴 당시 UN 미국대사의 책 'Surrender Is Not an Option'에서는 반대표를 던진 나라로 일본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당시 미국은 처음부터 반기문을 밀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계속해서 반대표가 나오자 한국과 외교적 갈등을 빚고 있는 일본을 의심했고, 이에 유엔 주재 일본대사를 찾아가 입장을 바꿀 것을 설득하자 다음 투표에서 반대표가 기권표로 바뀌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정확한 물증은 없는지라 마냥 일본이 반대표를 던졌다고 생각하기는 힘들긴 합니다. 실제로 당시 반기문 선거진영의 외교관과 측근들은 또 다른 후보였던 인도의 샤시 타루가 전임 사무총장인 코피 아난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상황이었던지라 가나를 의심하고 있었고, 일본은 아닐 것이라며 이 책을 미심쩍어하는 시선도 있는 모양입니다.

또 다른 용의자(?)로 의심받던 중국의 경우는 오히려 반 총장을 적극 밀었다고 합니다. 유력 후보 중 1명이 중국의 최대 가상적국 둘 중 하나인 인도 외무장관인 샤시 타루였기에 샤시 타루 당선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서 반기문을 밀었다고 합니다. 참여정부 당시 한중관계가 나쁘지 않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엉뚱하게도 중국에서는 중국인의 핏줄이 UN의 수장이 된다며 기뻐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결국 2007년부터 5년 임기의 제8대 사무총장으로 취임했고, 재임 막바지인 2011년 6월 17일에 만장일치로 연임에 성공하였고, 결국 2016년까지 임무를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과의 유혈사태가 심각해지는 상황에서도 손을 놓고 있는 유엔 안보리에 평소엔 보여주지 않았던 화난 모습을 보여주며 비록 레임덕인 몸이지만 개혁할건 해놓고 떠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2016년 12월 12일.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총회에서 '고별연설'을 하였습니다


일생 동안 외교 관료로 재직하여 한번도 특정 정당 소속의 정치인으로 활동한 적이 없지만, 대권 주자로 하마평에 오르곤 합니다. '국제무대의 최고위직을 역임한 한국인'이라는 점, 전국 단위 선거에서 점점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충청권을 지역 기반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 여야 기성 정치권에 공히 만족하지 못하는 중도층의 지지를 받기에 이상적인 후보라는 점이 대권 주자로서의 경쟁력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본인 스스로는 UN 사무총장 임기가 끝나면 은퇴하겠다고 하였으나, 끝내 불출마 선언에 대한 확답은 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이후로도 정치권에서는 한동안 가능성 있는 대권 주자로 오르내렸습니다. 그리고 2016년12월20일 뉴욕 UN본부에서 기자회견 중 대권 도전 의사를 묻는 질문에 "UN에서 배운 것이 대한민국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내 한 몸 불살라서…"라는 답변으로 사실상 도전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사실 이른바 반기문 대망론이라는 것의 역사는 생각보다는 긴데, 이미 2010년경부터 반기문을 대권 주자로 내세우자는 플랜들이 있었습니다. 민주당의 경우 유시민에게도 밀릴 정도로 당내 주자들이 확실한 지지를 얻지 못하자 2011년 말에 1차 임기가 끝나는 반기문을 영입하자는 주장이 몇몇 인사들을 중심으로 나왔으나, 반기문 본인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당내에서도 다른 사람의 등장을 더 기다려보자는 의견이 주를 이루면서 일부 인사들의 페이퍼 플랜으로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쟁력 있는 외부 인사를 원하는 분위기는 결국 안철수 바람, 문재인 대망론 등으로 이어지게 됬습니다.

또한 충청권을 기반으로 한 자유선진당의 경우에도 이회창, 이인제, 심대평 등이 있었으나, 이들은 민주당 주자들보다도 미미했던 터라, 반기문을 영입하자는 주장이 나왔으나, 이 역시 묻히고 맙니다. 한나라당의 경우에는 그나마 확고한 주자인 박근혜, 나름대로 대항마 수준은 되었던 김문수, 오세훈 등이 있어 반기문 영입론이 따로 대두되진 않았고, 외곽에서 호사가들에 의해 언급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론조사로 보면 이때 당시부터 후보 적합도에서 제법 높은 지지율을 얻으며 대권 잠룡으로 분류되고 있었습니다.

2015년 경남기업 회장·전 새누리 의원 자살 사건이 터지며 성완종 회장과 충청도 출신인 반기문 총장과의 인연에 대해서도 주목했으나 구체적인 사건이 확인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반기문 총장의 조카가 경남기업 소유였던 베트남 하노이의 빌딩(랜드마크 72) 매각과 관련하여 카타르 투자청의 서류를 위조하는 등의 경황이 알려져 국제 사기 의혹이 일기도 하였습니다. 반기문 총장은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주장했으나 , 당시의 정황상 의혹만으로도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청렴한 이미지가 무너진것은 불가피하게 되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5년 상반기 한 여론조사 기관의 차기 대권주자 조사에서 32%로 1위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반기문 본인이 대권 도전 의사를 공식화하지 않은 점을 반영해서인지, 좀 지나서부턴 대권주자 여론조사에서 반기문을 포함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편입니다. 그리고 현역 정치인이 아닌 외부 대권 인사 지지율은 거품이 껴있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습니다.

2015년 11월 새누리당의 홍문종 의원이 대통령은 외치, 총리는 내치를 담당하는 이원집정부 방식의 개헌을 주장했는데, 다분히 '반기문 대통령론'을 염두에 둔 듯한 뉘앙스를 풍겼습니다. 홍 의원이 소위 친박계로 분류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청와대측의 의중이 담긴 것 아니냐는 풍문이 제기되었지만 일단 청와대는 "개인 의견일 뿐"이라고 부인했습니다. 실제로도 반기문에 대해 크게 대세론을 밀고 있는 쪽은 새누리당에서도 친박계 쪽입니다. 비박계 쪽에선 이미 오세훈, 김무성등의 거물급 대선후보주자들이 있는반면 친박계 쪽에서는 이렇다할 대선후보가 없기때문 끽해봤자 서청원인데 서청원은 친박계에서 실세이긴 하지만 대선 후보자로서의 존재감은 사실상 없다싶이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반기문 총장의 지지세력을 표방하는 "친반연대"가 창당을 위한 준비과정에 돌입하면서 반기문 총장의 대권 출마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반기문 총장의 동생인 반기상씨는 이를 두고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반기문 총장의 측근들은 친반연대 발기인 등과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라며 "친반연대"라는 이름을 못 쓰게 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호일 전 의원도 '한누리평화통일당'을 창당하여 반기문 사무총장을 차기 대권후보로 영입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 친반기문을 표방하는 정당이 본인도 모르는 새 무려 3개 정당이나 후보를 등록했습니다. 그리고 셋 다 다른 파벌입니다. 이래저래 반기문 본인 입장에서는 상당히 난처할 듯 합니다. 굵은 글씨로 썼듯이 반기문 본인도 누군지 잘 모르는 갑툭튀한 사람들이 자기를 갖고 당을 만들어서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이 그야말로 자기들끼리 쇼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 일반 여론입니다.

위안부 합의에 대해 "역사가 높게 평가할 것"이라고 발언한 것에 대해, 차기 대선을 의식해 청와대와 연계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이후 측근이 청와대 비서관으로 들어가면서 의혹이 더 일고 있는 실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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