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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상

아파트의 역사에 대한 잡상

오삼도리 2017. 1. 19. 12:29


한국에서 당연한듯이 '아파트(apart)'라고 쓰지만 여기에는 어원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영어 apartment의 의미는 공동주택(집합주택)의 의미를 담고 있지만 ment를 떼어서 축약해버린 '아파트(apart)'의 의미는 '분리된, 떨어진'으로 오히려 그 반대라 볼 수 있습니다. 즉 한국의 아파트는 어원을 따라가자면 공동주택이 아닌 단독주택(들)을 의미하게 됩니다. 
실제 쓰이는 의미에서도 영어의 apartment와 한국의 아파트가 동일하지 않습니다. 영어 apartment는 임대용 공동 주택에 해당하지만, 한국의 '아파트'는 임대용과 분양용 둘 다 존재합니다. 분양용 공동 주택은 영어로는 condominium이라고 합니다.
일본에서 アパート라고 하면 이쪽은 그냥 '공동 주택'이라는 의미고, 한국에서의 '아파트'는 일본에서는 マンション(맨션)이라고 부릅니다, 현재는 덜하지만 한국에서도 과거에는 대형 아파트를 '맨션 아파트'라고 불렀습니다.
아파트 한 채에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수록 사실상의 국토 손실을 줄일 수 있다고 합니다. 아파트란 존재를 부정적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보면, 인구 100명이 있는데 아파트 한채에 100명을 수용할 수 있다면 나머지 땅들은 빈 땅이 되니 필요한걸 건설하면 된다는 이론이 있기도 합니다.


고대 로마에서 '인술라'(insula)'라고 불린 다층의 다세대 주택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아파트의 조상쯤 되는 건물로, 밤 중에 윗집 부부의 금슬이 어떤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이 시대에 이미 층간 소음은 상당한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이 시기 아파트는 나무와 벽돌, 진흙, 원시적인 시멘트로 만들어졌습니다. 10층이 넘는 인슐라들도 있었는데, 엘리베이터가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당연히 고층으로 갈수록 방세는 저렴했으며, 불법적인 증축이 밥 먹듯이 이루어졌습니다.

화재 문제 때문에 공동 화덕을 두거나, 공용 식당에서 빵과 음식을 사먹어야 했습니다. 배설물은 항아리에 갖고 나와서 하수도에 버리면 매너 있는 거였고, 매너 없는 사람들은 창문 밖으로 쏟았기 때문에 애꿎은 행인들이 피해를 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이 시대 어떤 시인은 인술라 근처를 지나면 누군가 던진 물건에 맞아 다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시를 짓기도 했습니다.

1층은 현재 주상복합단지처럼 상가로 쓰였는데, 냄새가 많이 나는 피혁점이나 시끄러운 대장간은 주민들이 축출했다고 합니다. 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나타나는 님비현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후 네로 황제 시절 로마 대화재를 겪으며 인술라는 법적 관리를 받게 되었습니다. 7층 이상 올려짓지 못하게 했고, 나무들보 사용을 금지하면서 자연히 아치를 이용한 건축기술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인술라 업자들은 악명이 높았는데, 그 유명한 키케로조차도 자신이 임대하던 인술라가 노후화 되어 붕괴되자, '더 높은 인술라를 지어 돈을 더 벌 수 있게 되었군!'라고 하면서 기뻐했다고 합니다.


10세기 이슬람국가 시대에 이집트 카이로에는 7층 높이의 아파트가 많이 있었으며 그곳에서 수백명이 살았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기록에 따르면 미나레트 (주로 이슬람사원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탑) 와 비슷하게 생긴 건물들이 도시에 늘어서 있었고, 도시 주민의 다수가 그런 건물에 살았으며, 한 동에 약 200명 정도의 주민들이 살았다고 합니다. 11세기 기록에는 몇몇 아파트들의 높이가 14층에 달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옥상에는 정원이 있었고, 정원에 물을 대기 위해 황소가 끄는 물레방아가 있었다고 합니다.

중동에서 특히 유명한 곳은 예멘의 시밤으로, 16세기에 지어진 이 도시는 "사막의 맨해튼"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흙벽돌로 지어졌으며 5층에서 11층에 이르기까지 그 높이도 다양합니다. 그 중에는 30m가 넘는 건물들도 있는데, 오늘날까지 흙으로 만든 가장 높은 건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근대적 아파트의 시작은 루이 14세의 치하의 17세기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전만하더라도 한 세대가 가옥 전체를 점유하는 전형적인 평면이 좁은 수직형 공간의 중세식 세장형 주택이 주류였지만 점차 평면이나 층을 나누어 플래츠 형식으로 여러 세대가 임대하기 시작한 것으로 당시 기록에 따르면 1층 상가 위에 3개의 층을 다세대 주거로 사용하는 건물이 많이 지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유형은 18세기로 넘어오면서 발전하기 시작해, 루이 15세 때인 1715~30년 사이에 건축가 빅토르 다일리가 생제르맹데프레 지역에 아파트와 비슷한 설계로 주택가들을 지어 성공적으로 분양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다만 이런한 수평 공간의 주택은 프랑스보다 이탈리아가 더 앞선 편으로 이탈리아에선 이러한 주택을 리네아형 주택으로 불렸습니다.


본격적으로 아파트가 모습을 드러낸 때가 18세기 초로 19세기 초인 1820년경부터 그 수가 늘기 시작해 1840년경부터 아파트 건설이 부르주아의 주요 투자대상이 되면서 대규모 산업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후 1850~60년대의 오스망 재개발을 거친 뒤 새로 닦은 넓은 대로를 따라 세워지기 시작해 지금의 파리의 풍광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밖에 리옹이나 마르세유같은 지방의 대도시와 유럽 각국의 몇몇 대도시에서도 아파트가 세워졌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입니다. 물론 2차 세계 대전으로 도시가 작살이 나고 동서로 갈라지면서 각각 모더니즘 양식과 소련식 아파트로 재건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부터 인구 과밀로 인한 교통난에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아파트의 층수는 보통 5~8층으로 파리의 경우 고도제한이 가장 긴 시간 동안 20미터를 유지했기 때문에 초창기에는 5층이 많다가 나중에 6층이 가장 많이 지어졌고, 고도 제한이 풀리면서 인구 증가와 함께 부동산 투자에 따른 이윤 창출의 압박이 커지는 것과 엘리베이터의 발명과 도입으로 6~8층으로 높아졌습니다. 동시에 모더니즘이 태동하기 전까지는 석재로 된 건축 장식을 활용해 외관을 마감했습니다. 파리의 아파트는 임대료를 기준으로 1등급, 2등급, 3등급으로 나누어져있으며, 3등급은 중산층을 위한 것이며, 1~2등급은 신흥부르주아를 위한 고급형이었고, 오스망 재개발 이후 대로를 따라 들어선 아파트들은 석재 장식으로 마감한 고급형이 주를 이루었고, 이후 벨 에포크를 거치면서 네오 바로크와 아르누보 양식으로 지어진 화려하고 웅장한 아파트가 대세를 유지했습니다.

파리의 아파트는 로마의 인슐라처럼 계층별로 각각의 층을 사용했는데 그에 따라 임대료는 달랐습니다. 1층은 상점이나 관리인 가족들이 상주했고, 2층은 우리 말로 로열 층에 해당하는 좋은 층(bel etage)라고 불렸고, 엘리베이터가 등장하기 전까지 가장 좋은 층에다가 지면으로부터 떨어져 있기에 프라이버시가 보호되고 전망도 좋으면서 걸어 다니기에 불편하지 않은 정도의 높이로 임대료가 가장 비싸기 때문에 주로 아파트 소유주가 살거나 아니면 부유한 사람에게 임대되었고, 대개 2층 전체를 주거 공간으로 사용했습니다. 3층부터 임대료가 싸지기 시작해 중간 수준의 부르주아들이 살았고, 4층부터 2~3층에 비해 임대자의 소득에 따라 분할되어 프티 부르주아들이 살았고, 지붕 아래의 공간인 다락방의 경우 가난한 예술가들이나 도시 상공인, 독거노인들이 사는 공간이었습니다.

뉴욕은 1839년 밀려드는 이민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Tenement라 불리는 특유의 빈민 아파트가 최초로 건설되었습니다. 1884년에는 The Dakota라는 이름의 럭셔리 아파트가 처음 지어졌지만, 여전히 대부분은 빈민 아파트인 Tenement였습니다.

지금과 같은 현대적인 아파트를 구체적으로 구상한 건축가는 프랑스의 르 코르뷔지에로 그는 1922년 프랑스 빈민구제안으로 "현대도시(Ville Contempraine)"안과 브와종 계획안을 내놓았습니다. 당시 일부 건축가 및 프랑스 정부와 문화가들은 호의를 표했지만, 1940년대에 들어와서는 문화성이 없는 공동주택, 미래도시에 관한 터무니없는 문화성제고가 일체없는 건축이라 경멸하는 정도로 그 안은 채택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공동주거를 싫어하는 유럽인의 특성과 기존 시가지가 이미 기존 건축물로 꽉 차있는 등의 문제도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소규모의 아파트는 지금도 생기고 있지만, 대단위 아파트는 드물게 보입니다.
늘 인간을 중심에 둔 건축 철학으로 유명했던 르 코르뷔지에는 수직도시를 꿈꿨습니다. 마을 공동체를 이 거대한 구조물 내에서 다시 되살려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온통 주택으로만 들어찬 오늘날의 아파트와 달리, 2층 어느 구역은 세탁소, 5층 어느 구역은 슈퍼, 7층 어느 구역은 탁아소, 옥상은 정원 및 수영장 등 건물 곳곳에 생활시설과 커뮤니티 시설을 배치해두었고,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각 장소로 찾아가 활용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서방 나토권에서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계획안은 절대적으로 많은 건축가들의 참고로도 쓰였으며 이후 그의 계획안은 마르세유에서 실현되었으며, 많은 아파트가 건설되었으나, 대부분 프랑스의 외곽지역(방리유)의 시테(아파트)는 슬럼화하여 범죄의 소굴로 낙인 찍히기에 이르게 됩니다. 허나, 마르세유는 문제가 더 심각한데, 오늘날에는 빈민들과 이민자들의 주거지로서, 폭동의 근원지로 인식되어, 건물 전체가 빈 건물도 많고, 내부 플랫들도 많이 비어있으며, 생활인프라도 좋지 않고, 치안은 보장되지 않으며, 집값도 매우 쌉니

대신 이런 종류의 아파트 건설은 공산주의 국가들에서 대규모로 이루어지게 됬습니다. 이 때문에 론리 플래닛에서는 서울의 도시경관에 대해 혹평하면서 "몰개성적인 소련식 아파트가 늘어선 회색도시"라고 평했습니다. 실제로 에스토니아를 비롯해 과거에 소련 혹은 위성국이었다가 민주화되면서 반러 감정을 갖게된 나라들은 이러한 아파트 문화 자체를 질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편, 1960~90년대의 한국을 비롯, 개발도상국들은 급격한 발전 과정에서 오는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감하게 이러한 '실험적'인 방식을 거쳤고, 몇 번의 실패를 통해 결국 성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시작은 유럽이었지만, 한국 아파트의 구조나 공간의 특징은 한옥에 가까운 점이 있습니다. 한국 아파트는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한 건물 외부에 건물명과 동(棟)을 대문짝만하게, 그것도 101이나 1002처럼 서너자리 숫자(등장 당시에는 1부터 시작했었다)로 표기하는 것은 한국 아니면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파트 벽면이 건설사 광고수단으로 변질되었다는 지적도 있지만, 그만큼 시인성도 뛰어납니다.

특히 실내구조가 그러한데, 한국의 아파트는 일단 현관으로 들어서면 널찍한 거실부터 나오고 방과 거실이 직접 붙어있는 구조로 이는 전통 한옥의 안마당과 대청마루 구조를 아파트에 그대로 적용시킨 것입니다. 원래 서구권이나 일본의 경우는 대체로 길쭉한 중복도나 홀부터 나오며, 거실이나 부엌은 한쪽에 분리되어 있는 구조를 취하고 있어서 한국과 달리 거실에도 문이 달린 집들이 더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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