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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상

후추에 대한 잡상

오삼도리 2017. 1. 19. 18:31


쌍떡잎식물 후추목 후추과의 상록 덩굴식물인 후추는 인도 남부의 말라바(Malabar) 해안이 원산지입니다. 현재는 동남아 일대에서 널리 생산되고 있으며, 향신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열매는 고추와 마찬가지로 덜익을 때에는 녹색이었다가 익을수록 빨갛게 변합니다. 그래서인지 외국에서는 고추와 후추를 나타내는 단어(pepper)가 같습니다.한자로는 호초(胡椒)인데 발음이 변화하여 지금의 후추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호(胡)자는 오랑캐를 뜻하는데, 중국에서 온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고추를 남쪽(일본)에서 들어왔다 하여 남만후추(혹은 왜개초)라 불렀다고 하는데 정작 일본은 고추가 고려에서 전래된줄 알고 고려후추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영어로는 black pepper라고 부르며, 항암작용과 항산화작용,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하는 효능이 있습니다. 한의학적으로 더운 성질을 지니고 있어서 몸을 덥혀주고 소화불량에 좋습니다. 다만, 더운 체질인 사람은 되도록 적게 먹어야 하는 음식이라고 합니다. 의약품을 복용하는 경우에도 약효가 강해지는 부작용이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하며, 후추를 가열하면 발암물질인 아크릴아마이드가 생성되기 때문에 요리 중에 뿌리지 말고 요리가 끝난 후에 곁들이는 게 좋습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여러 요리 재료중 가장 많은 를 부른 재료이며 동시에 역사를 바꾼 재료이기도 합니다. 물론 역사를 바꾼 것은 후추를 비롯한 다양한 향신료이긴 했으나,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는 대부분의 향신료는 후추입니다. 그것도 주식거리도 아닌 양념거리인데도 말입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고기를 소금이나 에 절여 저장했는데, 소금은 원래 화폐로 사용되었을만큼 쓰임새도 많고 귀한 물건이며 꿀은 그걸 능가하는 제품인지라 음식 보존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염장고기의 경우 시간이 지나면서 누린내가 굉장히 심해지며 선원들의 생활을 들어보기라도 했다면 잘 알겠지만 선상 비스킷과 함께 그 맛이 매우 안좋은 막장 음식 중 하나로 통했습니다. 짜도 보통 짠 게 아닌지라 배 위에서는 비스킷과 풀어서 일종의 꿀꿀이죽으로 만들어야 그나마 먹을만했을 정도 여서 이런 냄새를 가리기 위해 향신료의 존재가 절실했습니다. 일반 농민들은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타임같은 허브를 뿌리는 것에서 그쳤지만 기사나 영주급 정도부터는 동방에서 수입된 향신료를 고기에 뿌려 저장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나오는 기사나 영주급은 부유한 영지나 도시를 소유한 자를 말합니다. 신선한 생고기는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향신료는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대항해시대 당시 향신료 등을 통해 얻는 수익이 어느 정도였냐면, 배 열 척을 띄워 한 척만 돌아와도 순이익만 다섯 배였습니다. 또한 전쟁 보상금으로 금, 은, 비단과 함께 후추를 요구하던 시절도 있었으며, 다른 음식은 하인이 서빙해도 와 향신료만큼은 주인이 직접 다뤘다고 합니다. 물론 아주 높은 귀족들은 향신료 보관이 업무이던 하인이 따로 있었습니다. 향신료를 보관한 보물상자를 식사준비때 들고와서 필요한만큼 주고, 남은것은 정확히 계량해서 기록하고 남은 향신료를 잘 포장해서 다시 상자에 넣어 주인의 금고에 보관했다고 합니다. 냉장고가 발명되기 전에는 오래 보관한 고깃내를 없애기 위해 그리스, 터키 일대에서 계피를 사용하기도 했고, 동유럽의 경우 이 이를 대신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부유한 영주등의 사람들이 향신료를 뿌리는 것은 실제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과시용이었습니다. 그래서 후추는 오히려 필수품이라기보단 사치품에 더 가까웠습니다. 현대의 기준으로 말하면 요리에 금박을 입히는 셈입니다. 예를 하나 들면 향신료를 다루는 다큐멘터리에서 중세 고급 닭요리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 통닭의 겉면을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가 대부분인 가루 반죽으로 떡칠하고 굽는 요리였습니다. 재현했더니 멀리 있어도 향신료 향이 코를 자극했고, 껍질을 벗겨 먹었는데도 향신료 향이 배어 재료 본연의 맛은 찾아볼 수 없는 요리는데 그런 요리를 중세에는 고급으로 쳤었습니다.
당시 중세에는 쟁반 가득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를 담아주면 그걸 한웅큼씩 집어 페퍼밀 같은 것으로 즉석에서 갈아먹는것이 관례였다 합니다.
술이나 음료수에 후추 같은 향신료를 넣는 행위는 지금이라면 이상해 보일 테지만 그 시대엔 최고의 예우였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 잔재는 남아있어서 남은 와인을 과일, 향신료와 함께 끓여 먹는 뱅쇼라는 음료가 있으며 한국의 경우 수정과나 백숙을 끓일 때 통후추를 넣는 것 또한 향신료가 귀하던 시절의 잔재입니다.

또한 육수를 우려낼 때 후추 같은 향신료를 갈지 않고 통으로 넣어 끓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강한 향이 재료 고유의 맛과 향을 묻어버리지 않게 하려는 것도 있었지만, 귀한 향신료를 말려서 재활용하기 위한 것도 있었습니다. 차 역시 귀했던 시절에는 차를 우려내고 남은 것을 또 쓰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이런 향신료 중에서 가장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했던 것이 후추였습니다. 이후 중세 후반에 가면 농민들도 시장에서 돈을 좀 털면 후추를 살 수 있을 정도로 사용이 보편화되었고, 이러한 변화에 기분이 상한 높으신 분들은 정향이라든가, 육두구라든가, 아니면 사프란이라든지. 다른 향신료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이슬람 쪽에서 동방무역을 독점하던 때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해서 알 하나하나를 주는 것만으로도 세금을 대신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가장 비싼 향신료라는 사프란과 거의 맞먹는 수준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흑사병이 창궐할 때는 향신료의 향기가 병을 쫓는다 생각하여 다른 향신료와 더불어 더 값이 올랐습니다.

이렇게 가격이 폭등하면서 유럽의 각 국가에서는 이슬람을 거치지 않고 직접 인도에서 후추를 사올 수 있는 새로운 항로를 뚫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서회항로 '발견'도 애초의 목적은 인도항로를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바스코 다 가마가 이끄는 포르투갈 선단이 1498년 인도의 고아에 입항하면서 본격적인 대항해시대가 개막합니다.
하지만 항로가 개척되고 식민지가 생겼을 때에도 값은 금방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독점과 가격유지를 위해 후추 산지에서 자라는 후추 나무를 주기적으로 태워버려 인위적으로 산출량을 조절했으며 후추 열매를 빼돌린 자는 사형에 처했을 정도입니다. 때문에 이런 비싼 값을 노린 상인들은 후추양을 속여 가격을 불리려 했습니다. 이를테면 겨자껍질, 노간주나무 열매, 완두콩 가루를 섞어서 양을 불리거나 심하면 창고 바닥의 먼지를 섞기도 했었다고도 합니다.
참고로 중세 유럽은 음식에 장난치는 것에 대해 매우 엄격하여 빵의 무게를 속인 죄로 한 제빵업자를 거름통에 처넣고 하루종일 삭혀줄 정도였습니다. 만약 위에 적힌 만행들을 저질렀다가 걸렸다면 그자리에서 당장 참수당하였을겁니다.
이후 아프리카에서 후추 재배가 성공하면서 값이 크게 폭락해 관련 상인들의 줄도산이 이어지게 되었고 그동안 후추라는 향신료에 목매단 것에 대한 반향인 것인지 후에 유럽에선 월계수잎이나 바질 같은 토속 향신료가 각광받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한국의 경우 후추의 물가변동은 고려 조선시대 때 아주 크게 나타나는데, 고려시대 때는 아라비아와도 무역을 할 정도로 해외무역이 발달하여 가격이 저렴하였으나 조선시대로 넘어가면서 해외무역횟수가 줄어들어 후추는 비싸졌습다. 성종은 후추를 직접 길러보려고 일본, 류큐 왕국의 사신들이 올 때마다 후추 씨앗을 가져다주면 큰 상을 내리겠다고 할 정도였고, 징비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서 온 사신들이 잔치 도중 후추알을 던지니 너나할 것 없이 일어서서 후추를 줍는데 여념이 없었다고 합니다.
일본의 경우, 수출품 목록에 후추가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그들도 후추에 대해 잘 알고 있었겠지만, 일본 요리에는 후추는 잘 안들어갑니다. 실제로 우리가 아는 일본의 식문화 발달은 매우 최근인 근대에나 완성되었고, 전통적으론 조리법이나 향신료 사용이 매우 단순하고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후추를 사용하거나 먹는 것은 생소했고, 무역의 수단으로 사용하던 탓이 크기 때문입니다.
현대에 와서도 서양요리의 필수 중 필수 향신료 중 하나다. 보통 '간을 한다'라고 하면 한국 등 동양 문화권에서는 '소금간을 한다.', '간장을 넣는다.'를 떠올리지만, 서양 문화권에서는 소금+후추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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